1997, 그땐 그랬지
한의학을 공부하기 전에 나는 자연과학(생물학)을 공부했다. 당시에 학부제라는 이름으로 자연과학의 모든 분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2학년까지 공통과정을 이수케한 후에 3학년부터 각 과에 진입하여 해당 전공을 세부적으로 공부하였다.
하지만 1학년때 친했던 동기들은 이후에도 계속 만나게 되고, 오히려 전공과목의 동기들보다 더 친하기도 했다.
학부제 당시 내가 속해있던 자연대 9반도 그런 모임이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유를 만끽하며 즐기던 대학생활의 추억이 묻어있는 모임. 특히나 9반은 많은 정이 가는 모임이다. 물론 학부제는 이제 폐지되어 더이상 유입되는 후배가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동창회지에 글을 하나 써달라고 하여, 새벽에 부랴부랴 쓴 허접한 글을 기록한다.
1997, 그땐 그랬지
나와 동기들이 입학한 1997년은 지금 2016년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이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에게 1997년은 핵심기억으로 저장되었나보다. 그때의 기억들이 아련하면서도 여전히 생생하다.
9반과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96선배들과의 대면이 첫 만남이었다. 96대표로 인국형이 학교생활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고 다른 선배들은 각각 신입생들에게 붙어서 부연설명을 해주셨던 것 같다. 나에게는 종해형이 설명을 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도영이과 좀 친해져서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선배 말을 경청했었다. 그러던 중 느지막이 지종이가 서류가방을 들고 교실에 들어 왔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신입생 환영회 때에는 단연 ‘싱그러운 97’ 강지현을 잊을 수 없다. 구수한 진주의 사투리로 장기자랑을 하며 신입생 같지 않게 차분하게 노래를 불렀다. 정훈이는 굵고 강렬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것이 기억나고 현석이는 긴 머리를 손으로 넘기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매우 크고 작은 술자리에 참석하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성규, 태영이를 알게 되었고(당시엔 둘의 이미지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4.19마라톤을 뛰면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상준이와 친해졌다.
반방에 가면 구름 과자 냄새를 자주 맡을 수 있었는데. 희뿌연 연기 속에서 황희선, 박세란, 최수진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유진이는 담배보다는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반방 한켠에서 동렬이는 군대 이야기를 많이 했었고, 지종이는 바둑을 자주 뒀다. 빨간 머리의 김지애와 초록 머리의 최수진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이성호는 술 마시면 얼굴이 불타는 듯 붉었다가 창백해지곤 했다. 하지만 치홍이는 술을 마셔도 얼굴빛이 늘 같았다.
반마당에는 투덜이 창수가 골든 슈즈를 신고 족구를 했고, 공부의 달인 김성철이 종종 함께 하기도 했었다. 천문학과 형님들께서 야구를 할 때면 고졸신인 유세호가 폼을 잡고 투구를 하며 볼을 던졌다. 늘 흑인의 운동신경을 뽐내던 홍성규는 족구든 야구든 팩이든 노련했다. 팩차기를 할 때 종종 엄수정이 참여하곤 했는데 느릿한 행동과 달리 꽤 잘 찼다. 검도를 배운 지윤이도 날렵하게 팩을 잘 차곤 했었다. 만명이는 팩을 차면서도 강지현에게 사랑을 날렸고 윤호는 농구를 하며 눈썹을, 정규는 축구를 하며 곱슬머리를 휘날렸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당구장에 가면 평소 보기 힘든 지환이 형과 현욱이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현경이는 수업시간에만 볼 수 있었는데 그래서 더 보기 힘들었던 거 같다. 경호는 과외를 많이 했고, 그 자본으로 아싸리닷컴이라는 벤쳐회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힘찬이와 본웅이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학교에는 아주 가끔 출몰하곤 했다.
이제 곧 마흔을 앞두고 1997년 발매된 카니발의 ‘그땐 그랬지’가 생각난다. 그때 우린 참 어렸고 뭘 몰랐지만 설레는 젊음이 있었다. 참 느렸고 늘 지루해서 시간이 흐르길 바랐는데, 어느새 마흔이다. 하지만 같이 늙어가는 97학번 벗들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다. 그립다 친구들아!
1997.2.21 새내기 새로배움터 단체 사진(96 & 97)